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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아그라의 적응증과 부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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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비아그라는 보약이나 만병통치약이 아니라 단지 발기부전 환자의 치료제일 뿐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발기부전의 일시적인 치료제이다. 약을 복용할때만 효과가 있기 때문에 필요할 때마다 복용을 해야한다. 실제로 환자들이 이러한 사실을 알고 나서는 많은 실망을 한다. 비아그라는 발기조직인 음경해면체에 존재하여 cGMP를 분해시키는 제5형 포스포다이에스테라제(phosphodiesterase) 라는 효소를 억제함으로서 음경해면체에서 생성되는 산화질소 (NO)의 작용을 강화하여 정맥동의 확장을 지속시킴으로서 발기부전에 치료효과를 보인다.
그런데 제5형 포스포다이에스테라제는 다른부위의 혈관 평활근에도 존재하므로 비아그라 복
용시 내인성 산화질소의 작용 강화에 의한 부작용으로 혈관이 확장되어 안면홍보, 두통, 저
혈압 등이 나타날 수 있다.
1현재 시판되고 있는 비아그라는 파란색의 엷은 막으로 코팅되어 있으며 25mg, 50mg 용량의 다이아몬드 모양의 알약이다. 100mg짜리는 아직 국내에서 시판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용할 수 없다. 실데나필은 경구투여후 신속히 흡수되며 공복기에 복용했을 때 1시간이내에 최고 혈중 농도가 이루어지며 약물의 반감기는 약 3-5시간이라고 한다. 국내의 임상실험결과 62%에서 발기능을 향상시키는 효과를 가져 왔으나 부작용으로 안면홍조가 31.8%, 두통이 22.7%, 색약현상이 6.1% 등으로 외국의 임상시험에 비해 부작용의 발현율이 1.5-3배나 되었다고 한다. 또한 임상시험 대상자수가 너무 적었고 심혈관 질환자는 배제되었으므로 안정성을 평가하기에는 무리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다.비아그라복용시 주의해야할 사항이나 권장사항 혹은 금기사항은 너무 많기 때문에 이 지면을 할애하여 열거할 수가 없어 비아그라의 부적응증과 일반적인 주의점에 대해서만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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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아그라의부적응증 (Contraindication)
11. 질산염(nitrates)계통의 약물을 현재 복용하고 있는 환자. 예를들면 nitroglycerin 과 같은 약과 복용시에 극심한 저혈압을 유발할 수 있다.
12. 어린애나 여자* (*여성성기능장애의 치료제로 비아그라의 사용여부는 현재 임상시험중임)
비아그라 사용에 대한 일반적인 주의점
11. 비아그라를 사용하기 전에 반드시 환자의 의학적병력과 발기부전의 원인에 대한 검사를 해야 한다.
12. 성적활동과 관련하여 어느정도 심장 위험이 있기 때문에 발기부전을 치료하기 전에 환자의 심혈관계를 검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13. 음경지속발기증의 소인이 있는 환자 (겸상적혈구증, 다발성골수증, 백혈병)나 음경에 해부학적인 기형이 있는 환자(페이로니씨병)에게는 신중히 투여해야한다.
14. 비아그라와 상호작용이 있는 약물과 함께 복용하지 않도록 주의를 준다.
15. 색소성 망막염환자나 출혈이상 또는 활동성 소화성 궤양이 있는 환자에게는 신중히 투여해야한다.
16. 비아그라와 다른 발기부전 치료제와 병용 투여에 대한 안전성과 유효성은 아직 밝혀지지않았기 때문에 병용 투여는 권장되지 않는다.
1따라서 비아그라는 경구용 발기부전 치료제로 발기부전에 대한 기존의 치료제에 비해 생리적인 발기를 유도하고 원인에 따라 다르나 약 60-70%의 발기부전 환자에서 발기능을 향상시킨다. 그러나 비아그라는 혈관작용제로 환자의 전신상태에 의해 영향을 받을 뿐만 아니라 심혈관계 질환이나 병용약물에 따라서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으므로 처방전에 환자의 의학적 병력에 대한 면밀한 조사와 발기부전의 원인에 대한 검사가 선행되어야 하고 나타날 수 있는 약물의 부작용에 대해 환자에게 알려줌으로서 약제의 사용으로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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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민병래(작가)]
▲ 국군제5사단에서 1983년 5월에 의문사한 이윤성 이 사진은 대학1학년때 사진이다.
ⓒ 이인효제공
1983년 5월 4일 새벽 세 시경, 위병 근무를 마친 김재철은 내무반으로 가려고 연환경관련주식
병장을 가로질렀다. 그는 가는 길에 심사실에 들러야 했다. 4월 30일에 연행되어 수사받던 이윤성 일병, 5사단 27연대 소속인 그가 취침 중인지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심사실 문을 여니 놀랍게도 그가 보이지 않았다. 김재철은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이윤성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본부건물로 뛰어가 당직사관인 김차경에게 알렸다. 부대원이 30명 황금성게임장
안팎인 205보안부대에는 비상이 걸렸다. 이윤성을 찾으라는 목소리와 부대원의 군홧발 소리가 뒤엉켰다.
혼란스러운 가운데 수색견이 화장실과 세면장 사이의 계단을 타고 테니스장으로 뛰어올랐다. 수색견은 심판대 앞에서 울부짖었다. 허공에 떠 있는 검은 물체, 바로 심판대의 햇빛 가리개 테두리에 목을 매달고 있는 이윤성이었다.증권투자공부
그의 목에는 혁대가, 혁대와 심판대의 모서리는 군화 끈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김차경은 라이터로 군화 끈을 끊고 땅으로 끌어 내려 인공호흡을 실시했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김차경은 서둘러 205보안부대 운영과장 김동식 소령에게 보고했다. 대략 새벽 3시 30분경이었다
8일 후면 의가사 제대인데
이윤성은 왜 주검이 되었주식직업
을까? 그는 1983년 4월 28일 자로 의가사 전역 명령을 받아 5월 12일이면 제대할 예정이었다. 숨을 거둔 5월 4일부터 8일 후면 군대를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보안대의 조사가 가혹하더라도 조금만 더 버티면 되는데 왜 목숨을 끊었을까? 혹 보안대에서 가혹행위를 당하다 숨진 건 아닐까? 그렇다면 이를 은폐하기 위해 시신을 테니스장으로 옮겨 자살로 꾸민오션파라다이스7
걸까? 제5사단 헌병대장 유용채중령과 손영적중사는 이윤성사망사건에 대한 수사를 진행해 이윤성이 205보안부대로 연행된 경위를 밝혔다.
205보안부대에서 2소대 내무반을 순찰할 때 이윤성의 관물함에 (판금서적인) '철학개론'이 있고 이 책자의 갈피에 '안전보장증'과 '월북만이 참된 삶의 길'이란 북괴의 불온전단 2매가 발견되었다. 205보안부대장장기환은 유인물 습득경위 및 목적을 규명하기 위해 임의동행을 지시했고 이윤성은 4월 30일 (5사단을 관할하는) 205보안부대로 연행되었다.
아울러 헌병대는 자살의 원인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윤성은 독자로서 과잉보호속에 성장하며 현실도피적 심리상태를 가졌다. 이를 시정하려는 부친이 신문팔이를 시키는 등 과도한 욕망을 부려 부모를 원망하고 고독한 생각을 가졌다. 시위 가담 활동으로 갑자기 입대하게 되어 정신적 충격을 받았고 제대가 임박한 상황에서 (과거 학생운동 전력과 불온삐라를 습득한 행위로) 제대연기 혹은 처벌을 받을까 두려워 자살을 결심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윤성은 4월 30일 이전에도 보안부대에 소환된 적이 있었다. 그는 아버지 이명률이 면회갔을 때 "어디서 부르면 겁이 나 몸이 떨린다"고 말했다. 2소대에서 같이 근무한 고재필과 조성각은 2001년 시작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문사위) 조사에서 "이윤성이 소대를 벗어난 적이 있고 자주 면담을 했다"고 증언했다. 또 27연대 보안반 서무병이었던 임채상은 "이윤성이 205보안부대로 가는 차량을 기다리기 위해 2~3회 연대 보안반에서 머물렀다"고 말했다. 이를 종합하면 이윤성은 여러 차례 보안부대로 불려 갔던 것으로 보인다.
이윤성은 부대생활의 일거수일투족 또한 감시받았다. 2대대 서광남대대장은 이윤성의 동향을 관찰하고 기록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2소대 선임하사 이동화는 이윤성의 동태를 파악하여 상부로 보고했고 2대대의 보안대 주재관 유재명은 매주 2소대를 방문해 이동화와 면담하거나 관찰기록을 검토했다. 장근호 소대원은 "이윤성이 연대보안대로부터 호출당하면 보안대원이 이윤성의 관물대를 뒤지는 것을 2~3회 본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수시로 보안부대에 불려 가고 군대생활 내내 유리 상자에 놓였던 이윤성, 그는 정말 삐라를 책갈피에 숨기고 북으로 가려 했을까? 이것이 발각되자 처벌이 겁나 며칠 후면 제대인데 스스로 목을 맸을까?
'학생의 날' 연합시위로 끌려간 이윤성
성균관대 81학번으로 역사철학 계열에 입학한 이윤성은 사학과 80학번 김현수가 지도하는 '역사·철학 계열' 1학년 세미나모임에 참가한다. 2학년이 되어 이윤성은 전공을 사학과로 선택한 후 과동기인 오진우, 조홍익, 오강과 함께 분단 시대의 여러 문제를 공부했다. 이윤성은 또 써클 인문과학연구회에서도 활동했다.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와 에리히 프롬이 쓴 '자유로부터의 도피' 등을 읽으며 세상을 보는 눈을 키웠다. 그는 2학년이 되면서 82학번 세미나를 지도했고 1982년 8월 말에는 인문과학연구회 회장으로 뽑힌다.
그해 9월 일본의 교과서 왜곡이 이슈로 떠올랐다. 일본 문부성이 일본의 '한반도 침략'을 '진출'로, 독립운동에 대한 '탄압'을 '진압'으로 기술하라고 지시한 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9월 27일, 서울 시내 대학생 1만여 명이 시청과 청계천 등지에서 연합시위를 벌였다. 이 싸움은 11월 3일 '학생의 날'시위로 이어진다. 서울 지역 대학생 수천 명이 '전두환 타도'를 외치며 종로2~3가를 행진했다. 시위는 치열했고 연행된 학생이 400여 명에 이르러 시내 경찰서의 유치장이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이날 김영수(정외과 80), 남규만(철학 81), 김돈하(경제 81) 등 60~70명의 성대생이 연행됐는데 이윤성도 광교 부근에서 붙잡혔다. 이윤성은 성대를 관할하는 동대문경찰서 유치장에서 5일까지 조사받고 주동인 A급으로 분류되었다. 동대문경찰서로 아버지 이명률과 막내매형 박정관이 불려 왔다. 다른 학우의 부모도 여럿 있었다. 경찰은 이윤성의 아버지에게 구속되지 않으려면 군대를 가야 한다고 협박했다. 이명률은 이윤성이 2대 독자이며 자신이 예순을 넘어 "이윤성이 현역 입영대상이 아니다"라고 맞섰다. 경찰은 단기 6개월 사병으로라도 자원입대하라고 거듭 압박했다. 이명률은 아들의 감옥행을 막기 위해 '입대동의서'를 쓸 수밖에 없었다. 이윤성도 어쩌지 못했다. 몸은 잡혀있고 아버지가 서명을 했기에 그는 11월 6일 병무청직원과 동대문서경찰에게 이끌려 103보충대로 들어간다. 신체검사 등 모든 징병절차가 무시된 이른바 '현지 입대'였다.
이윤성이 군대에 입대한 82년 11월은 보안사의 움직임이 심상찮은 때였다. 그해 5월에 '좌경 의식화 불순분자 대상 대공 활동 지침'을 마련한 보안사는 11월 17일, '특수 학적 변동자 심사 및 순화 계획'을 수립해 녹화 공작에 본격 착수한다. 이 공작에 따르면 A등급은 매달 관련 자료가 수집되고 심사·순화·프락치 강요의 대상이었다.
이윤성은 이런 상황에서 신병교육대를 거쳐 5사단에 들어갔으니 범의 아가리로 들어간 셈이다. 이미 5사단에서는 1975년에 강제 징집된 경북대 의대생 현승효가 의문의 죽임을 당했고 1982년 7월에는 연세대생 정성희가 주검이 되었다. 이윤성이 숨지고 6개월 후인 1983년 12월에는 서울대학교 79학번 한희철이 숨졌다. 이윤성은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고 알 수도 없었다. 그는 27연대 2대대로 배속되어 연천군 대광면 대마리 철책 지역에서 근무했다. 이윤성은 용기 있게 적응해 간다. 하지만 먹잇감을 노리는 보안사의 마수가 뻗쳐왔다.
▲ 이윤성의 대학시절 모습 그는 성균관대 사학과 다니던 중 강제징집당했다.
ⓒ 이인효제공
4월 30일은 운명의 날
몇 차례 소환되었던 이윤성은 본격적인 녹화 공작을 받기 위해 4월 30일 205부대로 연행되었다. 5월 4일까지 무슨 일이 있었을까? 보안부대에 가면 통상 '나의 성장기'를 써야 한다. 50쪽이고 100쪽이고 하염없이 써야만 한다. 또 전두환의 일대기 <황강에서 북악까지>와 같은 책을 읽고서 소감문을 내야 한다. 이윤성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또한 그에게 성대 학생운동의 계보도를 그리라고 하고, 성대 학생운동권의 핵심이 누구인지를 캐물었으리라. 하지만 이윤성은 보안대의 수사에 협조하지 않았다. 이런 이윤성을 205보안부대에서 곱게 놔둘 리 없었다. 결국 그는 연행된 날부터 4일 만에 숨졌다. 군대로 끌려간 1982년 11월 6일부터 6개월 만에 벌어진 일이다.
사고 당일 5사단은 유족에게 이윤성의 죽음 소식을 매우 늦게 알린다. 당시 보안사가 작성한 <불온유인물 소지자 조사 중 자살사건 조사결과보고서>에 따르면 이윤성은 06:30분에 5사단 병참근무대를 거쳐 08:00시에 제105야전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그런데 가족에게 처음 통보된 시간이 10:40분이다. 대대장 서광남이 연락했으나 전화를 받은 외할머니와 의사소통이 잘 안되었다고 한다. 시신이 오전 일찍 수습되었는데 직장을 다니거나 사업을 한다면 집을 비우기가 쉬운 10시 40분에야 첫 연락을 했으니 매우 늑장을 부린 셈이다. 결국 14시경에 이르러서야 아버지 이명률에게 연락이 닿았다. 사체 발견으로부터 무려 11시간이 지나서다. 당연히 의문이 든다. 이 오랜 시간 동안 205보안부대와 급보를 받았을 보안사령부, 그리고 제5사단은 대책회의를 했을 터인데 무슨 얘기를 나누고 어떤 결정을 했을까?
이 의문에 해답을 주는 '내사 보고서'가 있다. 사고 당일 보안사준위 한 명은 강동세무서 직원으로 위장하여 이윤성의 집으로 전화를 건다. 사망 사실을 알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윤성의 아버지는 강동구에서 명성이라는 예식장을 운영했는데 이를 1982년 10월에 매각한 사실이 있다. 보안사 준위는 이 점에 착안, 감사에 대비 자료를 정리하는데 누락 부분이 있어 문의한다는 취지로 이윤성의 어머니와 통화를 한다. 이 대화 후 보안사준위는 "집안의 동태를 파악하였는 바 현재는 이윤성의 사망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라고 보고한다. 놀랍지 않은가? 유족에게 시급하게 연락하고 사건 경위를 수사해야 할 군에서 세무서 직원을 사칭해 전화를 걸고, 유족의 동태를 파악했다는 사실이.
의심스러운 정황은 또 있다. 이윤성의 아버지 이명률과 매형 셋이 16시경 야전병원에 도착했을 때, 가족을 맞아 일선에서 설명한 사람은 205부대의 운영과장과 5사단헌병대장 등 6명이다. 그런데 보안사의 내부 자료에 보면 이들 외에 (5사단이 소속한 6군단을 관할하는) 106보안부대장, 수사과장, 법무관 그리고 사령부수사관 등 4명이 현지상황을 조종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사실은 보안사령부가 이윤성의 죽음에 얼마나 당황했고 또 얼마나 기민하게 대응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정성희가 주검이 된 지 1년이 안 돼 이윤성이 죽었으니, 더더욱 사망 장소가 보안부대 안이고 조사받던 중에 숨졌으니 보안사는 진상규명요구가 거셀 것이라 두려웠을 것이다. 이 불씨를 제거하기 위해 그들은 가족에게 최대한 연락을 늦추고 대책 회의를 통해 "삐라를 소지해 월북을 기도했다, 처벌이 무서워 자살했다"는 거짓 서사를 꾸민 게 아닐까? 이를 위해 사령부 차원에서 인력을 파견해 현장 지휘를 했던 것이 아닐까?
그런데 205보안부대의 가족 설득과 회유는 벽에 부딪힌다. 운영과장은 이명률에게 이윤성이 "아버지가 4월 19일 면회 왔을 때 자신에게 철학개론을 줘 여기에 불온삐라를 보관했다"고 진술했다고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이명률은 그런 책은 알지도 못하고 본인이 전달한 사실도 없다고 일축했다. 그럼에도 운영과장은 "월북 기도를 추궁하자 이윤성이 계속 부인해서 조사 중이었고 5월 1일 두 차례에 걸쳐 감시병에게 면도칼을 요구했다"며 이윤성이 자살할 마음이 있었음을 내비쳤다. 이명률은 "지난번 면회 때 군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다. 앞으로 제대하면 철학교수가 되겠다"고 약속했다. (어떠한 기미도 없었는데, 더구나 제대를 며칠 남겨두고) 자살할 이유가 없다고 맞섰다. 납득이 안되니 유족은 거듭 질문하고 해명을 요구했다. 그러자 205부대운용과장은 돌연 유족을 향해 "이 빨갱이 새끼들아"하며 소리를 질렀다. 유족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윤성의 사체는 매형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육군과학연구소 군의관 박의후대위가 부검을 했다. 기막힌 건 부검이 병원 안에서가 아니라 연병장 한 귀퉁이에 친 야전텐트 내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군은 서둘러 부검하고 사건을 빨리 매듭지으려 했을 뿐이다.
가족과 성대 학생들의 투쟁이 시작되다
이윤성의 장례 이후 유족과 친구들은 분한 마음을 삭일 수 없었다. 진실을 파헤치고 싶으나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1984년 학원자율화조치 이후에야 캠퍼스에 숨통이 트이면서 유족과 성대생은 이윤성 죽음의 진상을 밝히는 투쟁에 나선다. 1984년 4월 3일 성대생 수백 명은 '성균관대학교학원민주화추진위' 발족식을 겸해 금잔디광장에서 이윤성추도식을 갖고 2시간여에 걸쳐 행진하며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이윤성이 죽은 뒤 한 달여 지나서 고려대 80학번 김두황이 22사단에서 의문사한지라 고대에서도 마찬가지 투쟁이 일어났다. '고려대자율화추진위'는 1984년 4월 13일 창립식을 갖고 4월 17일 많은 학생이 민주광장에 모여 '고김두황학우추모식'을 열었다. 성대생은 5월 4일 이윤성기일에 맞춰 문과대광장에서 1주기 추도식을 하고 교문 앞으로 진출해 경찰과 투석전까지 벌였다. 마침 역대 교황 중 처음으로 한국에 온 요한 바오로 2세가 혜화동의 가톨릭대학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했는데 경찰이 쏜 최루가스가 여기까지 번져 재채기를 하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 이윤성 1주기 추도식의 모습 당시 성대신문에 실린 사진이다.
ⓒ 성대신문제공
성대생의 진상규명 열기가 고조되자 이윤성의 거주지를 관할하는 '강동보안대'는 이윤성의 집을 찾아가 "의문사라고 학생들이 시위를 하는데 가족이 내통하지 않고 이럴 수 있냐, 재발하지 않도록 하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당시 성균관대 대학원을 다니던 매형 박정관은 보안대의 등살에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해 학위는커녕 수료도 못 했다고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아파트 경비실 등을 통해 가족의 동향을 1995년까지 감시했고 전화를 도청하는 기미도 보였다. 1990년 10월 보안사에 근무하던 윤석양 일병은 '청명계획'이라 불린 '친위 쿠데타'계획과 이를 위한 민간인사찰 실태를 폭로했다. 이 사건의 충격과 파장은 매우 커 노태우는 이상훈 국방부 장관과 조남풍 보안사령관을 경질했다. 보안사는 이름도 기무사령부(이하 기무사)로 바꾸며 사과와 함께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그런데 이윤성의 가족을 1995년까지 사찰했으니 기무사는 문민정부라는 김영삼 정권 시절에도 옛 버릇을 고치지 않고 악행을 계속한 것이다.
<덧붙이는 글>1) 이윤성은 국군 제5사단 27연대 2대대 5중대 2소대 소속이었다.2) 이윤성이 자살한 수단은 혁대와 군화 끈이다. 그런데 2002년 발표된 의문사위 조사보고서에서는 '혁대'가 아닌 '허리띠'란 표현을 썼다. 사고 당일 105야전병원으로 간 둘째 매형 안용태는 현장에서 혁대라고 들었고 그들이 내민 일차조서에도 혁대라고 써 있었다고 밝혔다. 그런데 헌병대가 발표한 수사보고서에서는 최종적으로 허리띠란 표현을 쓴 것 같고 의문사위는 이를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3) 수사결과보고서 원문을 구하지 못해 의문사위의 결과보고서에서 이를 재인용한다. 뜻을 정확히 하기 위해 단어와 문장을 조금 바꿔 옮겼다. 의문사위는 2000년 12월 28일 이윤성 유족의 진정을 받아들여 2001년 1월 13일 조사를 개시했다.4) <군사안보지원사령부>가 제출한 자료를 보면 보안사 준위의 이름은 지워져 실명을 알 수 없다.5) 가족을 맞은 6명은 205부대 운영과장과 대공계장, 5사단 헌병대장, 조사과장, 법무참모 대위, 검찰관 중위 등이다.6) 부검 장소에 대해서는 둘째 매형 안용태가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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