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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힘 김문수 대선 후보와 1970년대 한일산업(현 도루코)에서 함께 노동운동을 한 도진곤 씨(78)는 김 후보가 당시 이 같은 말을 강조했다고 전했다. 김 후보는 당시 이 회사 노조위원장을 맡아 회사와의 임금 및 처우 투쟁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노동운동의 아이콘’으로 거듭났다. 도 씨는 “김 후보는 자기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면 변함이 없고 옆도 뒤도 안 돌아본다”며 “편하게 표현하면 약간 꼴통인 것 같다. 독하게 끝까지 밀어붙이면서도 사적으로 만나면 아주 부드럽고 인간미가 철철 넘쳤다”고 회상했다.
동아일보가 만난 김 후보의 지인들은 김 후보에 대해 “정직하고 평생 기득권 편에 서지 않았다”는 평가부터 “지나치게 강성이고 고 한국자산관리공사전환대출 집이 너무 세다”는 주장까지 엇갈린 지적을 내놨다.
● 대학 시절 두 차례 제적 당해
김 후보는 1951년 경주 김씨 집성촌이 모여 살던 경북 영천군 황강동에서 7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김 후보는 비교적 부족함 없이 자랐으나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가 친척 보증을 잘못 서서 읍내에서 판잣집 생활을 하게 됐다. 김 주택담보대출 금리인하 후보는 “열등감에 빠지게 만드는 큰 요인이었다”고 회고했다. 김 후보는 그 와중에도 성적이 우수해 1964년 영천군에서 영남 지역 명문학교인 경북중학교에 진학한 세 명 안에 들었다.
김 후보는 중학교 시절부터 정의감을 보였다고 한다. 김 후보의 중·고·대학 동창인 이원덕 전 노무현 정부 대통령사회정책수석은 “김 후보는 덩치 큰 친구들이 3년 1억 힘이 약한 친구를 괴롭힐 때 주저하지 않고 책상에서 딱 일어나서 ‘하지 마라’고 나섰다”고 했다.
김 후보는 경북고에 진학해서는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3선 개헌 반대 시위에 나섰다. 고등학교 친구들과 대구 명덕로터리에 있는 2·28 기념탑까지 뛰어가 ‘3선 개헌에 반대한다’는 성명서를 읽은 것. 이 전 수석은 “김 후보가 직접 성명서를 쓰 가락시장자연산 고 반마다 돌면서 ‘우리 가서 낭독하자’고 하나하나 다 모았다”고 했다. 김 후보는 이 일로 무기정학을 당했다가 2주일 뒤 복학했다.
서울대 재학 시절 김 후보의 모습(오른쪽에서 두 번째).
김 유급 후보는 1970년 서울대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친구 아버지와 사촌형으로부터 경영학이 ‘신식 학문’이란 권유를 받아서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운동권에 발을 들이는 계기를 맞았다. 학교 선배였던 심재권 전 의원으로부터 “대학에 출세나 하려고 왔느냐”란 얘기를 듣고 ‘후진국사회연구회’에 가입한 것. 김 후보는 연구회를 통해 용두동 청계천변 판자촌에 가서 살고, 고 김근태 전 의원의 권유로 대학생 신분을 숨기고 구로공단의 드레스 미싱 공장에 취업한 위장취업 1세대였다.
김 후보는 전국 학생 시위 관련으로 1차 제적을 당했다. 제적 시기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를 만났고 동대문시장 봉제공장 재단보조로 일했다. 1973년 제적이 풀려 학교에 돌아갔다가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재차 제적을 당했다.
1988년 노동 운동하던 시절 김 후보가 양심수 전원 석방을 촉구하고 있다.
● 노동운동 이끌다 2년 6개월 옥살이
김 후보는 결국 노동운동 외길을 가기로 결심하고 보일러 기술을 배워 1976년 한일산업에 입사했다. 한동안 착실하게 일하면서 동료들의 신뢰를 쌓은 뒤 1978년 노조 교육선전부장을 거쳐 위원장 직무대리를 맡았다. 도 씨는 “김 후보가 아주 조리 있게 또박또박 정확하게 얘기하는데 보통 똑똑한 사람이 아니었다”며 “저는 나무를 보고 얘기하면 이 친구는 숲을 보고 얘기하더라”고 말했다. 김 후보는 당시 임금 투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김 후보는 1980년 신군부가 들어선 뒤 남영동 치안본부대공분실에 끌려갔다.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사건과 관련해 서울대 선후배들과 조사를 받다가 49일 만에 풀려났다. 이때 김 후보가 서울대 출신인 게 노동계에 처음 알려지면서 오히려 명성이 높아졌다. 이후 김 후보는 한국노총 금속노조 남서울지역지부에서 청년부장을 맡아 산하 노조 지원을 하는 등 활동 범위를 넓혔다. 그러다가 1980년 5월 비상계엄 뒤 삼청교육대 정화 대상자로 지목됐고 결국 회사에서 해고됐다.
금속노조 남서울지부 활동 중 세진전자 노조위원장이었던 설난영 씨를 만났다. 전남 고흥에서 태어나 순천에서 자란 설 씨와 말투, 문화가 달랐지만 마음이 끌렸다. 김 후보가 설 씨가 동생과 함께 살던 자취방에서 도피 생활을 하면서 결국 1981년 결혼했다. 설 씨와의 슬하에 딸 동주 씨를 뒀다. 당초 아들이면 ‘동지’로 이름을 지으려 했다고 한다.
그는 1984년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를 설립해 부위원장을 맡았고, 1985년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국장도 맡았다. 이소선 여사는 생전에 김 후보를 “내 아들”이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당시 함께 생활한 김준용 국민노조위원장은 “공장 일 후 야학을 하던 시절에 우리가 일 끝나고 자취방으로 모여서 밥 먹고 공부하고 곯아떨어지면 문수 형님이 방을 다 청소하고 동지들 양말 전부 빨아 개고 밥도 미리 해놨다”며 “우리를 진심으로 대한 형님”이라고 말했다.
김 후보는 1985년 8월 군사독재반대투쟁을 내건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창립에 참여해 지도위원을 맡았다. 이후 공안당국의 감시가 심해져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숨어 지냈다. 1986년에는 5·3 인천항쟁에 참여했다. 인천에서 열린 신민당의 개헌추진위원회 현판식에 학생, 노동자, 재야인사 등 민주화운동 세력이 총집결해 벌인 시위였다. 김 후보의 보좌관을 지낸 차명진 전 의원은 “그날 집회에서 김 후보를 처음 봤다”며 “머리에 긴 가발을 쓰고 여장을 한 채 집회를 지도했다”고 전했다.
김 후보는 인천항쟁 사흘 만인 1986년 5월 6일 서울 잠실의 한 가정집에서 검거됐다. 김 후보는 보안사령부로부터 갖은 고문을 당했지만 서노련에서 함께 활동한 심상정 전 의원의 위치 등을 불지 않고 버텼다. 김 후보는 1심에서 징역 4년, 항소심에서 징역 3년이 확정됐다. 이후 2년 6개월 동안 옥살이를 하다가 1988년 개천절 특사로 출소했다.
● 민중당 선거 참패 2년 뒤 민자당 입당
김 후보는 1990년 고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장과 제도권 정치에 도전하기로 하고 민중당을 창당했다. 김 후보는 노동위원장, 이재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은 대변인을 맡았다. 김 후보는 “나는 울산 현대자동차, 거제 대우조선 등 대규모 공장에 민중당의 지지자를 만들기 위해 시간을 많이 바쳤다”고 했다. 그러나 민중당은 1992년 14대 총선에서 후보를 낸 51개 지역구에서 전패했고 정당의 존립에 필요한 득표율 2%도 못 받아 해산됐다. 이 이사장은 “선거에서 참패한 뒤 계룡산 동학사 밑에서 마지막 총회를 열고 향후 진로에 대해 2박 3일 동안 밤샘 토론을 했다”며 “재창당이냐 해산이냐를 두고 결론은 ‘재창당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각자 정치적 진로는 알아서 결정하자’였다”고 전했다.
김 후보가 1994년 김영삼 당시 대통령에게 민주자유당 신임 지구당위원장 임명장을 받고 있다.
김 후보는 2년 뒤인 1994년 3월 “지금 여당이 개혁을 잘하고 있고 가장 개혁적인 정치인이 김영삼 대통령”이라며 당시 여당인 민주자유당에 전격 입당한다. 김 후보의 서울대 은사인 안병직 명예교수는 “우리가 운동할 때 가졌던 휴머니즘을 현실에 제대로 접목해 실현할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라며 입당에 찬성했다고 한다.
운동권의 전설이었던 김 후보가 야당도 아닌 여당에 입당한 것을 두고 과거 동료들로부터 변절자, 배신자 등 거센 비난이 쏟아졌다. 당시 이해찬 전 의원은 “말로는 개혁을 내세우지만 노선의 포기이자 일종의 변절”이라고 했다. 2011년 이소선 여사가 별세했을 때 장례식장을 찾은 김 후보에게 “변절자가 왜 왔느냐”고 쏘아붙이는 소동이 일기도 했다.
제도권에 들어간 김 후보는 1996년 부천 소사에서 세 차례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경기도지사 재선을 거치면서 강성 우파로 변신했다. 사회주의국가의 몰락과 북한 인권의 실상 등을 지켜보면서 변화가 생긴 것이다. 차 전 의원은 “김 후보는 동지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고통을 바깥으로 표현하진 않았다”며 “김 후보에겐 지적인 고집이 있어서 자유민주주의자가 되는 데 오래 걸렸다. 뼈를 깎는 전향의 과정이었다”고 전했다. 김 후보를 한일산업 노조위원장 시절부터 지켜본 인명진 전 자유한국당 비대위원장(목사)은 “(김 후보는) 올곧은 게 장점이자 단점”이라며 “좌우를 다 겪은 사람이다. 다 겪었기 때문에 중도”라며 웃었다.
조권형 기자 buzz@donga.com임재혁 기자 heok@donga.com서지원 기자 wis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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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후보는 경북고에 진학해서는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3선 개헌 반대 시위에 나섰다. 고등학교 친구들과 대구 명덕로터리에 있는 2·28 기념탑까지 뛰어가 ‘3선 개헌에 반대한다’는 성명서를 읽은 것. 이 전 수석은 “김 후보가 직접 성명서를 쓰 가락시장자연산 고 반마다 돌면서 ‘우리 가서 낭독하자’고 하나하나 다 모았다”고 했다. 김 후보는 이 일로 무기정학을 당했다가 2주일 뒤 복학했다.
서울대 재학 시절 김 후보의 모습(오른쪽에서 두 번째).
김 유급 후보는 1970년 서울대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친구 아버지와 사촌형으로부터 경영학이 ‘신식 학문’이란 권유를 받아서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운동권에 발을 들이는 계기를 맞았다. 학교 선배였던 심재권 전 의원으로부터 “대학에 출세나 하려고 왔느냐”란 얘기를 듣고 ‘후진국사회연구회’에 가입한 것. 김 후보는 연구회를 통해 용두동 청계천변 판자촌에 가서 살고, 고 김근태 전 의원의 권유로 대학생 신분을 숨기고 구로공단의 드레스 미싱 공장에 취업한 위장취업 1세대였다.
김 후보는 전국 학생 시위 관련으로 1차 제적을 당했다. 제적 시기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를 만났고 동대문시장 봉제공장 재단보조로 일했다. 1973년 제적이 풀려 학교에 돌아갔다가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재차 제적을 당했다.
1988년 노동 운동하던 시절 김 후보가 양심수 전원 석방을 촉구하고 있다.
● 노동운동 이끌다 2년 6개월 옥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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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후보는 1980년 신군부가 들어선 뒤 남영동 치안본부대공분실에 끌려갔다.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사건과 관련해 서울대 선후배들과 조사를 받다가 49일 만에 풀려났다. 이때 김 후보가 서울대 출신인 게 노동계에 처음 알려지면서 오히려 명성이 높아졌다. 이후 김 후보는 한국노총 금속노조 남서울지역지부에서 청년부장을 맡아 산하 노조 지원을 하는 등 활동 범위를 넓혔다. 그러다가 1980년 5월 비상계엄 뒤 삼청교육대 정화 대상자로 지목됐고 결국 회사에서 해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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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84년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를 설립해 부위원장을 맡았고, 1985년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국장도 맡았다. 이소선 여사는 생전에 김 후보를 “내 아들”이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당시 함께 생활한 김준용 국민노조위원장은 “공장 일 후 야학을 하던 시절에 우리가 일 끝나고 자취방으로 모여서 밥 먹고 공부하고 곯아떨어지면 문수 형님이 방을 다 청소하고 동지들 양말 전부 빨아 개고 밥도 미리 해놨다”며 “우리를 진심으로 대한 형님”이라고 말했다.
김 후보는 1985년 8월 군사독재반대투쟁을 내건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창립에 참여해 지도위원을 맡았다. 이후 공안당국의 감시가 심해져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숨어 지냈다. 1986년에는 5·3 인천항쟁에 참여했다. 인천에서 열린 신민당의 개헌추진위원회 현판식에 학생, 노동자, 재야인사 등 민주화운동 세력이 총집결해 벌인 시위였다. 김 후보의 보좌관을 지낸 차명진 전 의원은 “그날 집회에서 김 후보를 처음 봤다”며 “머리에 긴 가발을 쓰고 여장을 한 채 집회를 지도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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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중당 선거 참패 2년 뒤 민자당 입당
김 후보는 1990년 고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장과 제도권 정치에 도전하기로 하고 민중당을 창당했다. 김 후보는 노동위원장, 이재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은 대변인을 맡았다. 김 후보는 “나는 울산 현대자동차, 거제 대우조선 등 대규모 공장에 민중당의 지지자를 만들기 위해 시간을 많이 바쳤다”고 했다. 그러나 민중당은 1992년 14대 총선에서 후보를 낸 51개 지역구에서 전패했고 정당의 존립에 필요한 득표율 2%도 못 받아 해산됐다. 이 이사장은 “선거에서 참패한 뒤 계룡산 동학사 밑에서 마지막 총회를 열고 향후 진로에 대해 2박 3일 동안 밤샘 토론을 했다”며 “재창당이냐 해산이냐를 두고 결론은 ‘재창당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각자 정치적 진로는 알아서 결정하자’였다”고 전했다.
김 후보가 1994년 김영삼 당시 대통령에게 민주자유당 신임 지구당위원장 임명장을 받고 있다.
김 후보는 2년 뒤인 1994년 3월 “지금 여당이 개혁을 잘하고 있고 가장 개혁적인 정치인이 김영삼 대통령”이라며 당시 여당인 민주자유당에 전격 입당한다. 김 후보의 서울대 은사인 안병직 명예교수는 “우리가 운동할 때 가졌던 휴머니즘을 현실에 제대로 접목해 실현할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라며 입당에 찬성했다고 한다.
운동권의 전설이었던 김 후보가 야당도 아닌 여당에 입당한 것을 두고 과거 동료들로부터 변절자, 배신자 등 거센 비난이 쏟아졌다. 당시 이해찬 전 의원은 “말로는 개혁을 내세우지만 노선의 포기이자 일종의 변절”이라고 했다. 2011년 이소선 여사가 별세했을 때 장례식장을 찾은 김 후보에게 “변절자가 왜 왔느냐”고 쏘아붙이는 소동이 일기도 했다.
제도권에 들어간 김 후보는 1996년 부천 소사에서 세 차례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경기도지사 재선을 거치면서 강성 우파로 변신했다. 사회주의국가의 몰락과 북한 인권의 실상 등을 지켜보면서 변화가 생긴 것이다. 차 전 의원은 “김 후보는 동지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고통을 바깥으로 표현하진 않았다”며 “김 후보에겐 지적인 고집이 있어서 자유민주주의자가 되는 데 오래 걸렸다. 뼈를 깎는 전향의 과정이었다”고 전했다. 김 후보를 한일산업 노조위원장 시절부터 지켜본 인명진 전 자유한국당 비대위원장(목사)은 “(김 후보는) 올곧은 게 장점이자 단점”이라며 “좌우를 다 겪은 사람이다. 다 겪었기 때문에 중도”라며 웃었다.
조권형 기자 buzz@donga.com임재혁 기자 heok@donga.com서지원 기자 wis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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