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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의 섬 스페인 마요르카Mallorca는 최근 떠오르는 여행지다. 특히 신혼부부들의 방문이 많은데, 아직 날이 따뜻해지지 않은 비수기면 바닷물이 차가워 해수욕도 못 하고 따분하게 보내기 일쑤다.
하지만 잘 들여다보면 도처에 가볍게 걷기 좋은 길들이 무궁무진하다. 그래서 아웃도어 마니아들한테는 이 시기가 오히려 절호다. 숙소도 저렴하고 쉽게 구할 수 있고 주차도 쉽다. 그래서 섬 곳곳에서 자전거를 타거나, 트레킹을 즐긴다. 등산 준비가 좀 미흡해도 괜찮다. 마요르카 대자연을 살짝 맛볼 수 있는 코스들이 있다. 시작은 작고 조용한 산악마을, 발데 개인돈 모사Valldemossa에서 출발한다.



높은 고도에서 바라본 발데모사 마을. 황토색 벽돌로 지은 집들이 트라문타나산맥 속에 아름답게 녹아 있다.


'GR221'을 보면 마요르카 걷기길이 보인다
먼저 새마을금고 실비보험 마요르카 트레킹을 개괄해 보자면 이렇다. 마요르카는 북서부에 세라 데 트라문타나라는 큰 산맥이 있고 그 외엔 대부분 평지다. 트라문타나는 험준한 산악지형의 경관적 가치와 무슬림과 기독교 문화가 절묘하게 결합된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바꿔드림론 3개월 코무나 정상부에 다다르자 발데모사 항구가 있는 북서쪽 방향으로 마요르카다운 장쾌한 조망이 펼쳐진다.


괜찮은 걷기길은 모두 트라문타나를 따른다. 필두는 170여 km의 GR221. 서남쪽 끝 안드라츠 항구에서 출발해 트라문타나산맥 구석구석을 탐험하며 북동쪽 끝 팔렌카 항구까지 이어진다. 보통 펀드 원금 10개 구간으로 나눠 종주한다.
현지 트레커들에게 평가가 좋은 코스는 크게 두 부류다. 하나는 울릉도 행남해안산책로처럼 해안절벽 비경을 따르는 길들이다. 섬이다 보니 동서남북 어디나 이런 예쁜 길들이 산재하는데 풍경이 좀 반복되고, 해안 특성상 환형으로 원점회귀가 잘 안 된다. 즉 걸었던 길을 되짚어 돌아와야 하는 경우가 많다.
네이버통합검색창다른 하나는 GR221을 부분적으로 도는 것. 이 길은 산줄기를 따르지 않고 산을 넘나들며 각 산악마을을 연결하는 형태로 조성돼 있기 때문에 마을을 거점으로 돌아보기 좋다. 가장 하이라이트 구간은 산악마을 발데모사와 소예르 주변이다.



산 조르디 고개에서 GR221을 버리고 탈출하면 임도처럼 넓은 길을 따르게 된다.


쇼팽박물관 뒷길에서 트레킹 시작
발데모사에선 북쪽에 솟은 카라골리Caragoli(944m)나 남쪽의 코무나(714m, 구글 지도엔 comuna de Valldemossa, 현지 등산지도엔 Moia de sa Comuna라 표기된다) 중 하나를 택해 돌아보고 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둘 다 GR221 코스를 따라서 각 산을 오른 뒤, 하산은 GR221이 아닌 다른 샛길을 통해서 원점회귀하는 방식이다. GR221인 구간은 이정표가 무척 잘돼 있는데 돌아오는 길들은 이정표가 제대로 돼 있지 않아서 내비게이션 기능을 지원하는 등산지도앱이 필수다. 난이도는 해발고도가 높은 북쪽 카라골리가 아무래도 더 높다. 길도 더 길고 경사도 더 가파른 편이다. 반나절로 가볍게 즐기려면 남쪽 코무나를 택하는 것이 훨씬 낫다.
들머리는 발데모사 남쪽 쇼팽박물관 인근에 있다. 발데모사는 고풍스러운 석조가옥들로 가득한 낭만적이고 조용한 도시다. 이곳에 머물렀던 대표적인 인물이 쇼팽. 연인인 조르주 상드와 함께 1838년 발데모사에서 잠깐 요양한 바 있다.
쇼팽이 머문 당시 하필이면 마요르카에 몇백 년 만의 추위가 몰려와서 그리 좋은 기억으로 남진 않았다. 하지만 불후의 명곡들은 남길 수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빗방울 전주곡'. 이는 조성진 피아니스트가 한국인 최초로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할 때 연주한 바로 그 곡이다. 쇼팽이 마요르카에 머문 기간은 채 1년도 안 되지만 작곡 활동으로는 가장 생산적인 시기로 꼽힌다고 한다. 그가 살던 집은 현재 쇼팽박물관으로 운영된다.
좀더 정확한 들머리는 구글 지도에선 첨성대처럼 생긴 방앗간 '몰리넷Es Molinet'을 찾으면 되며, 현지에선 GR221 이정표를 찾으면 된다. 마을 중앙 대로변에 있는 올리브오일 가게 '티엔다 손모Tienda Sonmo' 옆으로 올라가면 나온다.
마을길을 몇 굽이 오르면 작은 오솔길 입구가 나오며 바로 산 길이다. 여기엔 GR221 코스임을 알리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위에 붙은 건 북쪽 마을 데이아에 있는 칸보이 대피소Refugi de Can Boi까지 남은 거리 13.8km를 알리고 있고, 아래쪽은 남쪽으로 가는 GR221 중 중간 기점인 산 조르디 고개Coll de Sant Jordi까지 2.8km, 1시간 30분 걸린다고 안내하고 있다. 발데모사로 돌아오는 코스는 이 GR221을 따라 산 조르디 고개까지 진행한 후, 거기서 산허리를 도는 옛길을 통해서 원점회귀한다.
마요르카 유일 수호성인 탄생지
숲길 입구부터 3분 남짓 오르면 바로 발데모사 전경을 볼 수 있는 뷰포인트가 나온다. 시각적으로는 산뜻하고 청각적으로는 고요해 평화롭지만 후각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탄내가 심심하면 한 번씩 치고 온다. 쓰레기 태우는 냄새다. 산등성이 곳곳에서 봉화처럼 연기가 치솟는다. 그런데 이게 의외로 불법이 아니다. 10월 15일부터 그 다음해 5월 1일까지 마요르카에선 쓰레기 소각이 합법이다. 물론 영농폐기물이 아니라 유기물, 즉 나뭇가지나 이파리들만 태울 수 있다.
사유지 곁을 스치며 올라가는 길은 단순명쾌하다. 접근금지 표지판이 붙어 있는 철조망이 외길을 만든다. 꾸준히 오르고, 또 오르면 된다. 볕이 잘 들지 않는 북면이라 곳곳에 바위에는 진한 이끼가 끼었다. 보이는 나무들은 모두 생소하다. 올리브나무와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털참나무, 아몬드나무 등이다. 이따금 친숙한 소나무가 나올 때면 내심 반갑다.



코스 초반에는 이끼가 짙게 낀 오르막 숲길이 길게 이어진다.


점점 인간의 흔적이 없어질 무렵, 큼지막한 석굴 하나가 나온다. 안에선 물을 길었던 흔적이 얼핏 보인다. 그 옆엔 그림이 걸려 있다. 발데모사 마을 집집마다 붙어 있는 마요르카 유일의 수호성인 성녀 카탈리나다. 스페인은 각 마을과 도시마다 수호성인이 있는데 마요르카는 성녀 카탈리나다. 그리고 이 성녀의 고향이 바로 발데모사다. 1531년 태어난 카탈리나는 부모님을 일찍 여읜 탓에 불우한 유년 생활을 보냈다. 그래서 수도원에 가고 싶었는데 그를 맡고 있는 친척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쳤다고 한다. 그때마다 집을 뛰쳐나와 마을 뒤편에서 기도를 올리곤 했던 카탈리나를 성인이 나타나 위로해 주었다고 한다. 그림이 바로 그 장면을 담았다.



마요르카 유일의 수호성인 성녀 카탈리나의 그림이 걸린 석굴. 안에서 물을 길었던 흔적이 보인다.





마요르카 유일의 수호성인 성녀 카탈리나의 그림이 걸린 석굴. 안에서 물을 길었던 흔적이 보인다.


고도를 꽤 높여도 돌담은 계속 따라온다. 또 무너진 집터가 상당히 많다. 다른 재료를 쓰지 않고 순수 돌로만 쌓았다. 건식쌓기다. 영어로는 드라이스톤Drystone이라고 부른다. 제주도 돌담과 비슷한 방식인 셈이다. 집터는 과거 숯을 만들거나 생석회를 생산할 때 머물던 오두막의 흔적이다. 마요르카 전역에 경사진 곳이나 산중에는 숯을 굽던 원형의 터와 넓게 만든 가마터가 산재해 있다. 마요르카인들은 여름철이면 몇 주간 산에서 머물며 숯과 석회를 만들고, 이를 갖고 내려와 각각 빵을 굽거나 집을 보수하는 데 썼다고 한다. 둘 다 한때 마요르카의 주요 산업이었다.



길에서 다양한 집터를 발견할 수 있다. 과거 숯을 만들거나 생석회를 생산할 때 머물던 흔적이라고 한다. 지금은 GR221을 걷는 사람들의 귀중한 비박지 역할을 한다.


돌담 '공중을 걸어서' 넘어야
잔잔한 오르막을 따르다보면 어느 순간 등산지도앱이 안내하는 길이 돌담으로 막힌다. 주변을 둘러봐도 돌담이 쭉 가로막고 있어 우회로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해리포터에 나오는 9와 4분의 3 승강장처럼 그냥 몸을 밀어 넣으면 자동으로 공간이동하지 않는다. 한참 헤매다 돌담을 자세히 살펴보니 사이사이에 돌을 끼워 넣어 계단을 만들어뒀다. 대담하고 재밌는 발상이다.
공중을 걷는 듯 돌을 밟고 담을 넘으면 이제 마요르카다운 조망을 누릴 수 있다. 멀리 지중해는 파란색으로 반짝이고 산들은 유순하지 않고 거친 속을 툭 터놨다. 그 아래 계단식으로 만들어진 밭에선 사회적 거리두기를 확실하게 해둔 올리브밭과 양과 염소들이 풀을 뜯는 목장들이 깔렸다. 햇빛은 따스한데 공기는 시원한, 여름이 오지 않은 마요르카에서 누릴 수 있는 풍광이다.
길은 계속 능선 살짝 아래를 따른다. 걸으면서 바로 조망이 터지지 않고, 뷰포인트를 따로 알려주지도 않아서 눈치껏 오른쪽에 시야가 터진다 싶으면 올라가야 조망을 누릴 수 있다. 산 정상 표시도 없고 알려주지 않는다. 여러 지도에 공통적으로 산 이름에 '코무나comuna'가 붙어 있는데 이는 마요르카에서 마을 사람들이 같이 사용하는 산림에 붙는 명칭이라고 한다.
산 조르디 고개로 내려서는 길은 가파르고 미끄럽다. 반대편에선 GR221을 종주하는 사람들이 거친 숨을 뱉으며 올라온다. 들어보니 그룹마다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 다른 언어를 쓴다. 그럼에도 마주쳐 지나갈 때면 스페인어 인사인 "올라Hola!"를 외친다.
이따금은 길의 형체가 아예 사라진다. 그냥 지도상에 큰 어긋남만 없으면 직진으로 내려가면 된다. 반대편에는 흰소의 등걸을 닮은 기다란 바위 능선이 수평으로 늘어섰다.
내리막이 끝나는 곳이 산 조르디 고개다. 바르셀로나의 수호성인 산 조르디의 이름이 붙어 거창한 모습을 기대했으나 그냥 철문 하나만 덩그러니 있다. 손으로 문을 밀고 나가면 여기서부터 GR221과 헤어지게 된다. 문을 기준으로 오른쪽으로 돌담을 따라 오르는 길이 GR221, 정반대가 발데모사로 돌아가는 길이다. 길의 흔적은 돌담을 따라 좀 걸어야 나오니 헷갈려도 일단 가야 한다.
구덩이에 눈을 부어 얼음 만든 옛 마요르카인들
여기서부터는 등산지도앱에 의지해서 가야 한다. 갈림길이 나타나도 아예 이정표가 없다. GPS 기능이 있는 등산지도앱을 따라서 궤적을 잘 맞춰가는 수밖에 없다.
이 구간에서도 돌담을 한 번 넘어야 하는데 심지어 여긴 담 사이에 돌도 아닌 나뭇가지를 꽂아 넣어 이를 밟고 넘어야 한다. 힘을 주긴 불안하지만 제법 나뭇가지가 탄력 있고 담도 낮은 편이라 넘어갈 만하다. 딱히 조망도 없고 인적은 더더욱 없다. 그나마 길이 좁거나 경사가 있진 않아서 빠르게 숙제하듯 걸어 치우면 된다.
마을이 가까워지면 흥미로운 인공물을 하나 볼 수 있다. 바로 눈집 '카사 데 네우cases de neu'다. 4~5m 혹은 그 이상 깊이로 구덩이를 파고 돌로 벽을 튼튼히 쌓은 건축물로 눈구덩이라고도 부른다. 산등성이에서 본 집터처럼 옛 마요르카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문화유산이다. 이 지역에 눈이 잘 내리지 않고 연중 대부분이 건조하다 보니 마요르카인들은 겨울철에 혹 눈이 오면 이 구덩이에 눈을 마구 퍼 넣은 뒤 꾹꾹 눌러서 얼음으로 만들고 재, 나뭇가지, 풀 등을 덮어 보관해 놓고 썼다고 한다. 이 얼음 생산 방식은 20세기 초까지 유지됐다. 얼음은 주로 음식물을 보존하는 데 이용했다.



얼음을 보관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카사 데 네우'.


눈집을 봤으면 이제 길은 끝난다. 멀리 발데모사 시립박물관의 에메랄드빛 첨탑이 보인다. 이른 아침 트레킹을 시작했다면 슬슬 가게 문을 열고 잠에서 깨어나는 거리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총 거리 7km. 소요시간 2시간 30분.



발데모사 시립박물관.





지도 Alltrails.


월간산 6월호 기사입니다.